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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정공>학생공휘신명가장(學生公諱新命家狀)
學生公諱新命家狀 公諱新命字士執姓趙氏系出玉川鼻祖諱璋高麗光祿大夫門下侍中平章事三傳而玉川府院君諱元吉生瑜號虔谷官副正 世宗旌孝褒忠孫諱智崑與伯叔季同友愛築亭同處扁以相好監井邑縣治績見勝覽曾祖諱大承泰仁縣監生諱珏訓練奉事孫諱義吉通德郞是爲高祖曾祖諱時耈祖諱維春考諱東耘妣晋州鄭氏道寬女以 英廟戊午十二月二十二日生公幼齡聰慧及長俊偉以愛親敬兄爲本立道生以劬經勤稼爲行篤業充公以其考妣晩育季男被愛甚重而愉色婉容承順於養志適口便身供歡於養體矣至十七歲甲戌十二月二十日奄遭外艱雖有二兄伯出后仲蟄病躬執喪哀敬盡制十九歲丙子九月二十四日又遭母夫人喪叩呌靡逮克終前後喪情文無缺自後益爲敬事出后兄年長十八歲如事父家事巨細必須咨稟而行之及娶妻制産業稍存餘饒村隣飢寒者賴有溫飽婢僕數十口亦勤力耕稼以安其居築室具制而靜掃外舍一間貯書盈架延聘賢師敎子姪若孫必篤義方每當考妣諱辰務致豊潔宜有慶錄之自天佑之矣行年四十而無丈夫子閤夫人屢告以率副室而有績矣公止之曰吾亦晩生於先考四十五之齡則安知晩而有育乎且其生女則豈不生男乎果以是歲十二月十二日生男男長而生四子孝友之行滿于家庭著于鄕黨矣 純廟庚午四月二十九日終于寢春秋七十三墓在泰仁公墓下艮坐配豊壤趙氏通德郞尙誼女其私親多顯達或因其同僚之宰本府而有存訪則夫人或告公見宰而爲聞親堂安候公固守至室之戒時人難之矣夫人戊子十月十五日卒距其生癸亥壽八十六墓公塋同岡下艮坐一男二女男廷直贈司僕寺正女適昇州朴聖燁漢陽趙時良孫贄祥 贈吏議奭祥台祥珍祥曾孫永舜永華永弘永權 贈戶參長房出永才永琦平山申錫休妻二房出永八永一金海金洪奎妻三房出永律參奉永善永珪四房出嗚呼公正心勵行家而敦孝悌之道鄕而蔚慈惠之頌及今六七世餘蔭愈厚則積累之有素報應之得常於斯至矣五世孫炳箕炳儀炳黙謹飭好學克世其家猶恐世愈遠則無傳其茂德實行也推本於家庭遺蹟廣求於族戚鄕里所服高義屬余而請述家狀以圖傳世文獻之信余義不可以固辭乃參互攷據謹序次如右 從玄孫 洪根 謹述 학생공휘신명가장(學生公諱新命家狀) 공의 휘는 新命이요, 자는 사집(士執)이며 성은 옥천 조씨인데 고려 광록대부 문하시중 평장사 휘 장(璋)을 시조로 三전하여 휘 원길(元吉)은 옥천부원군이요, 생휘(生諱) 유(瑜)는 고려 부정(副正)으로 세종(世宗)때에 충효로 정포하였으며, 손자 지곤(智崑)은 백숙계와 더불어 우애하여 정자를 지어 거처하며 상호(相好)로써 현판하고 정읍현감으로 재직하며 치적(治績)이 우수하여 「여지승람」에 등재되었고 六대조 휘 대승(大承)은 태인현감이요, 생휘 의길(義吉)은 통덕랑으로 이 분이 고조요, 증조의 휘는 시구(時耈)요 조의 휘는 유춘(維春)이고, 고의 휘는 동운(東耘)이며 비는 진주정씨 도관(道寬)의 딸이다. 영조(英祖) 무오년(一七三八) 十二월 二十二일에 태어난 공은 어려서 총민하더니 장성함에 따라 준수하며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을 공경함으로써 도를 닦는 근본을 삼았다. 글을 부지런히 읽고 농사에 힘써 업을 충실히 하였으며 행실 또한 독실하였다. 고비(考妣)의 막내아들로 사랑을 많이 받아 즐거운 안색과 순한 얼굴로 뜻을 받들고 입에 맞고 몸에 편하도록 부모를 봉양하였다. 갑술년 十二월 二十일 十七세 때에 문득 부친상을 당하여 비록 두 형님이 있었으나 백형은 출계하고 중형은 와병(臥病)중이라 몸소 집상하며 슬퍼하고 공경하여 예제를 다하고 병자년 九월 二十四일 十九세 때에 또 모친상을 당하여 대신 못한 것을 머리 숙여 부 짖으며 전후의 상을 마치니 정문(情文)이 지극하였다. 이로부터 十八세 연장인 출후 백씨를 공경하여 부모같이 섬기고 대소의 가사를 반드시 여쭈어 본 뒤에 행하였다. 취처(娶妻)한 후에 조금 가산에 여유가 생기자 이웃의 춥고 굶주린 자가 이에 힘입어 따뜻하고 배부르게 되었다. 비복(碑僕) 수십 가구가 또한 부지런히 농사에 힘써 편안히 살았으며 제도를 갖추어 집을 짓고 바깥 사랑 한 칸을 서당으로 삼고는 어진 스승을 맞아들여 자손을 가르쳤으며 매양 부모의 제사날이 돌아 오면 제수를 정결히 봉진하니 마땅히 경사로움이 있을 것이며 하늘도 도와줄 것이다. 四十세가 되도록 아들이 없어 합부인이 부실을 얻어 후사를 이우라고 자주 고하였으나 공이 거절하며 말하되, 『나도 또한 선고의 나이 四十五세에 태어났으니 오래 뒤에 낳을지 어찌 아는가! 또 딸을 낳았으니 어찌 아들을 못낳는단 말인가.』라고 했는게 과연 이해 十二월 十二일에 생남하니 그 아들이 장성하여 네 아들을 두어 효우화열(孝友和悦)이 가정에 충만하고 향당에 저명하였다. 순조(純祖) 경오년(一八一○) 四월 二十九일에 향년 七十三세로 정침에서 별세하니 태인공의 묘소 아래 간좌에 안장하였다. 배는 풍양조씨 통덕랑 상의(尙誼)의 딸로 사친(私親)이 이름 높은 사람이 많아 혹 동료가 우리 고을 수령으로 와서 심방한 자가 있으면 『부인이 친당안후를 들으랴』 하고 공에게 고하면 공이 굳이 『권귀를 집에 들이지 말라.』는 경계를 지키니 당시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라고들 하였다. 부인이 무자년 十월 十五일에 춘추 八十六세로 별세하니, 공의 묘소와 같은 등성이 아래의 간좌에 안장하였다. 남 정직(廷直)은 증사복시정(贈司僕寺正)이요, 여는 승주 박성엽(朴聖燁)과 한양 조시량(趙時良)의 처이다. 손자 지상(贄祥)은 증 이조참의(贈吏曹參議)요, 석상(奭祥), 태상(台祥), 진상(珍祥)이다. 증손 영순(永舜), 영화(水華), 영홍(永弘), 영권(永權) 증호조참판(贈户曹參判)은 장방출이며, 영재(永才), 영기(永琦) 평산(平山) 신석휴(申錫休) 처는 二방출이고, 영팔(永八), 영일(永一) 김해 김홍규(金洪奎) 처는 三방출이요, 영률(永律), 참봉 영선(永善), 영규(永珪)는 四방출이었다. 아! 공이 바른 마음으로 힘써 행하여 집에는 효제의 도가 두텁고 고을에는 자혜의 가송이 성대하여 지금 六 七세에 남은 그 蔭德이 더욱 두터우니 여러대를 쌓아온 바탕이 있고 응하여 갚은 떳떳한 도리가 여기에 지극하다 하겠다. 五세손 병기(炳箕), 병의(炳儀), 병묵(炳默) 등은 몸가짐을 조심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능히 세덕을 계승할 만한 사람들로 세대가 오래되면 그 성대한 덕행을 전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근본적인 것은 가정 유적에서 참고하고 넓게는 친척과 고을 사람들이 감탄해마지 않았던 공의 높은 의리를 찾아 전세 문헌을 삼고자 나에게 가장을 기술하라 부탁하니 내가 의리상 사절하지 못하고 서로 참고하고 증거하여 삼가 이상과 같이 차서로 기술한다. 從玄孫 洪根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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